100일글쓰기

마침표는 찍지 않겠습니다

두번째 코로나에 걸렸다. 얼마전, 그러니까 내가 이주간의 다디단 휴가를 모두 쓰고 회사로 돌아온 첫날에, 내 휴가가 하도 달아서 한주만 더 쉬었으면 미련없이 회사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는 농담을 직장동료들에게 했다. 그 농담이 이런 식으로 실현되기를 바란 건 아니었다. 나는 일주일간 전시회도 보고, 성수나 상수(나는 아직도 두 지명이 몹시 헷갈린다. 두...

여의도 성모병원에는 진짜 성모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성모 '벽화'가 있다. 나는 지각을 하여 헐레벌떡 택시를 잡아타는 날이면, 노들길과 올림픽대로를 바쁘게 내달리는 차 안에서 홀로 정지된 성모를 본다. 그 모습은 감히 인상적이다. 나는 인상적이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는데(너무 추상적인 말이라고 생각해서), 그 벽화를 인상적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뭐라고 표...

같이 밤산책을 하며 걷기만 해도 사랑에 빠질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다시 또 쓸쓸해지는 바람만 불어옵니다. 저는 산책을 좋아합니다. 몹시 아프고 어두운 밤이면, 머리가 새하얗게 밝아올 때까지 걷고 또 걷곤 했습니다. 사실 그 때 정말로 밤이었는지, 마음의 어둠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저는 많은 날을 걸어다녔습니다. 음악은 그날의 기분을 대변합니다....

애인한테 요새는 이런 옷이 유행이란다, 하고 인스타에 올라오는 옷들을 보여주면, 그는 “에이 이런 옷을 밖에 입고 나가는 사람이 어딨어”라고 바보스러울 만큼 순진하게 대꾸하곤 했다. 운좋게 대역병시대와 걸맞는 라이프스타일을 갖추어, 사람 많은 곳에 원체 나돌아다니지 않는 사람다운 대답이었다. 정말로 이제는 속옷을 사야 해서 씩씩하게 서로의 손을 잡고 땡볕에...

내 가장 어리고 예쁜 시절과 인사하며

1. 응애 라는 말이 안웃겨요? 난 웃겨요 나 혼자 웃기니까 나 혼자 웃어야지 헤헤 웃기당.. 저 원초적인 발음이 웃기기도 하고, 생애 다시는 그때처럼 똑같이 울어볼 수 없을 울음소리를 이제와서 입에 올리니 어색하고 민망도 해서, 나는 회사에서 돌연 크게 히히 웃어버렸다 아기는 어떻게 울길래 성인과는 다르게 카랑카랑하게 울까? 진정성에서 나오는 vibe의 ...

Please be

1. 취직했을 때 큰맘먹고 16인치 노트북을 샀다. 원래 나는 14인치 노트북을 5년간 썼다. 넓어진 시야가 생경했다. 꼭 작은 티비같다. 이렇게나 화면이 넓어졌는데 나는 더 이상 화면을 가득 채운 공리도, 장국영도 양조위도 볼 새가 없다. 그 위에 조각조각 메모들이 발라져 있다 취재 내용과 심의신청, 공문 보내는 법 왼쪽에 있는 제보전화를 잘 헤치면 그 ...

옛날이야기

나는 잠들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 나는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낮잠을 잤다. 2. 원래 수면장애가 있다. 3. 생각이 많다. 이대로는 살아도 산게 아니다. 잠들 수 없는 나는 앉아서 꿈이나 꾼다. 내 꿈은 둥실둥실 잠자듯이 죽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내 뜻대로 안 된다면, 나는 지금처럼 평생을 살고 싶다. 일하지 않고도 먹고 ...

생각의 끝말잇기

어떤 연예인의 인터뷰 기사를 지나가는 길에 읽었다. 최근 엄마아빠가 재미있게 보고 있는 드라마 주인공이었다. 목소리 때문에 십 몇 년간을 학생 역할만 해서, 인중 수염을 12번이나 레이저 제모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제발 좀 나오지 말았으면 하는 게 있다. 여행가기 전날의 생리 같은 것. 달콤한 밀회에서 튀어나오는 암살방귀 같은 것. 냄새한테는 근엄하게 여...

우리는 목소리가 아닌, 말투만으로 사람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어느 산란하고 한산한 밤 모두가 자신만의 꿈을 낚아채어 수면으로 잠수하는 그 시간. 저도 어딘가의 이불 속에서 잠에 들랑말랑한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저는 애인과 전화를 끊고는, 조용한 방안에 혹여나 남아 있을 그 사람의 목소리를 더듬고 있었지요. 그가 없더라도 틀림없이 그임을 ...

프루스트에서 두아리파까지

여기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있다. 주인공 마르셀은 홍차에 마들렌을 적시다가 그 냄새에 그의 어린 시절을 복기하게 된다. 냄새로 과거의 경험이나 감각을 기억해내는 것을 이 소설의 작가 이름을 따 '프루스트 효과'라고 부른다. 뭐...글쎄다. 내가 더 감명깊게 본 소설은 <시간을 달리는 소녀>였기 때문에, 나...

첫 출근

동 틀 녘에 일어나 방의 불을 켰습니다. 원래의 저에게는 한밤중인 시간입니다. 아침밥을 먹습니다. 오늘은 모든 것의 처음이니, 깔끔한 인상보다는 지각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잡고 머리를 감고 말리는 일은 내일부터 해내겠다 다짐합니다. 귀찮거나 추워서 그러는 건 결코 아닙니다. 따로 챙겨와야 할 것은 딱히 없다고 들었지만 그래도 바리바리 짐을 꾸립니다. 필통과...

불안한 사람은 불안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

* 학부생 시절 작성했던 글을 다시 꺼냈습니다. *** 눈물이 그냥 죽죽 나오는 시기가 있다.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울고, 나를 잡아줄 수 있는 미지근한 온기를 가진 피부가 사방 어디에도 없어서 울었다. 방이 너무 차갑고 텅 비어있었다.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내 불안을 보는 사람들이 무서워할까봐 그러지를 못했다. 마음이 아프다는 건, 곪은 속을 갈라서 꺼내...